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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메아리 ::::
사회복지현장이 척박할지언정 그곳이 아름다웠노라 즐거웠노라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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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어쩌면 지구의 종말을 한번쯤 정말로 기대했을지 모를 해였습니다.
벽두부터 세상이 매우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민학교 때의 일기도 보관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1999년의 일기만 없습니다. 책장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졌지만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다이어리라도 어디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습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한 해였나 봅니다.
1999년 이른 겨울,
IMF 경제위기로 참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한국 땅에서 실업자라는 단어가 익숙해지고 노숙자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무렵, 저는 노숙자들의 삶을 이해한답시고 며칠 기른 수염과 완벽한 노숙자 패션(?)으로 대구 시내를 활보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구역,
당시 대구역에서는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저녁 식사를 제공하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무료 급식을 나오셨나 봅니다. 목사님께서 축도를 하셨고, 축도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120명 남짓의 성인과 고령의 어르신들로 길다란 줄이 만들어 졌습니다.
배가 약간 고팠지만 그래도 노숙자들의 삶을 이해한답시고 요란 떨며 나왔으니 저 길다란 줄에 서서 밥 한 그릇 얻어먹어야지 싶어, 앞서 줄을 선 사람들을 지나 끝에 서려다가 스쳐 지났습니다. 얻어먹을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급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한쪽 구석에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아저씨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왔으니 노숙자들과 대화라도 한 마디 하고 가야지 싶어 아저씨들 곁으로 갔습니다. 허름한 옷에 깍지 않은 수염하며 노숙자라고 꾸민 제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무턱대고 담배 한 대씩 권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의 대부분은 담배 한 대의 인심에 마음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만의 이야기로 법석이던 세 사람의 관심이 한순간에 온통 제게로 쏠립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친구랑 막노동 했는데 일하던 아파트 현장이 부도나면서 임금을 못 받아 이렇게 길거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그럴듯했습니다. 아저씨들도 금새 제 사정이 정말 그런 줄 알고 위로하기도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못난 놈, 에라이~ 내가 니 나이 때는 무서울게 없었다 임마, 어디 못나서 일해놓고 돈을 못받노. 어~이!” 하마터면 맞을 뻔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저씨들이 지내고 있는 월 15만원짜리 ‘쪽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속으로, 이거 제대로 걸렸다 싶었습니다. 이제 방안에 들어온 이상 꼼짝없이 여기서 자고 가야하는데, 사실 수중에 돈이라고는 4,000원 정도 있었으니 뭐 다른 수도 없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아침 일찍 빈 박스 주워다 팔아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먹자고 했는데, 아침부터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려 국밥은 물건너 갔고, 그렇다고 늦잠을 잘 형편은 아닌지라 슈퍼에서 담배 한 갑 사다 아저씨께 드리고 쪽방을 나섰습니다. 돌아서는 등 뒤에 대고 아저씨는 진심인지 지나가는 말인지 한 마디 하십니다. “오늘 돈 받으면 꼭 들리거라. 밀린 방세 좀 내주면 내 꼭 갚을께” 노숙자 행세 하며 거짓말 한 것이 후회되고 죄송하였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성당못에 내렸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리고, 노숙자들이 모인다는 문화예술회관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1월의 겨울 찬바람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르신들은 화투에 죄다 정신이 팔렸습니다. 노숙자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파 옵니다.
노숙자를 만나지 못하여 발걸음 돌렸습니다. 그냥 가기 싫어서 앞산을 올랐습니다. 시작할 때야 그럭저럭 오르겠다 싶었는데 산중턱에나 다다랐을까 배가 고파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도 덜 고팠는지 어찌 어찌해서 앞산에 다 올랐습니다. 앞산 정상에 오르니 제일 먼저 점심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주머니 3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얼마나 밉던지. 하하 호호 하면서 김밥이며 쌈밥이며 먹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입안으로 침이 꼴깍 넘어 갑니다.
올라가긴 올라갔는데 내려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저히 내려올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배가 고파서. 정말 내려오는 길에 두 번쯤 굴렀습니다. 넘어졌다고 합시다. 큰길가를 바로 앞에 두고 허기를 참지 못해 체육공원 벤치에 잠시 누웠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하늘이 노랗고 빙빙 돕니다. 날도 저물어 갑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설 힘이 없습니다.
맨 먼저 눈에 띄는 편의점으로 가서 사발면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습니다. 텅텅 빈 속에 씨뻘건 사발면 국물 들어갔다 생각해 보십시오. 속 뒤집어 집니다. 바로 화장실로 가서 먹은 것 그대로 쏟아 냈습니다.
기진맥진해서 다시 찾은 곳은 대구역입니다. 대구역 광장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해서 매일 저녁 무료로 저녁을 주고 있었습니다. 늦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기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주시려고 어느 단체에서 왔고 또, 100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섭니다. 사실은 저도 그 줄에 끼려고 다시 대구역으로 온 겁니다. 그런데, 길다란 줄이 이제 몇 남지 않게 되고, 더 이상 줄 선 사람이 없자 급식을 거둬서 가버린 뒤에도 저는 여전히 제 자리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주 제 자리만 지킨 것은 아닙니다. 갈까 말까? 여기 어느 누구도 나를 모르잖아! 오늘 하루 그냥 노숙자 체험한답시고 왔는데 그냥 먹으면 되지! 마음은 그 길다란 줄의 맨 앞에 섰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가 멈칫 하다가 다시 왔다 갔다 그랬습니다.
결국에는 주머니 톡톡 털어 1,000원 어치 붕어빵을 사먹었습니다.
그날 밤을 그렇게 대구역에서 지새우고 다음날 더 이상 대구 시내를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꼬박 2박 3일간의 경험에서 마음속 깊숙이 한 단어가 새겨졌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존심’ 입니다.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서도 무료급식을 얻어먹지 못해 1,000원 어치 붕어빵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옹졸한 저의 자존심’ 이었습니다. 옹졸하다고 표현할 만치 부끄러웠습니다. 죄책감은 아니더라도 분명 놀랄 일이었습니다.
대구역에는 100여명 이상이 그렇게 매번 무료급식을 이용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자존심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옹졸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료급식을 먹는 것에 마음쓰지 않을 사람도 있고 저처럼 멈칫 멈칫하거나 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했던 간에 그들에게도 ‘자존심’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자존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사입니다. 제가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순간도 이 ‘자존심’ 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 순간 한 눈을 팔다가 보면 어느 새 저는 동네사람들을 길게 줄 세우고 그 분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장애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긴장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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